2025.11.23 주일설교 l "사랑의 문안" 로마서 16:1~5

이종명 0 22

2025.11.23 주일설교 l "사랑의 문안" 로마서 16:1~5ㅣ설교:장귀삼 담임목사

 

사랑의 문안

로마서 16:1-5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지난 주일에 가족 백일장에 발표된 글을 조금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양현모 전도사님이 쓴 이행시 ‘감사’입니다.
감자탕
사주세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강수미 집사님이 추수감사절로 쓴 ‘내조’라는 오행시입니다.
추억이 쌓인만큼 남은인생 애틋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이여 오소서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을 경배하세
사사로운 부귀영화 한낮의 일장춘몽
절대적 영생복락 주님사랑 뿐이라오
추억이 쌓인만큼 남인 인생이 애틋한 대상은 남편이신 것 같습니다.
어서 주님 곁으로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윤영자 권사님이 쓰신 ‘황혼의 꽃’입니다.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 이제 더욱 느끼는 순간
나도 황혼에 와 있구나
찬란했던 삶은 추억으로 남고
허약해진 몸을 힘겹게 이끌며
저물어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니
눈도 침침 다리도 후들후들 심장은 두군두군
낡아진 몸 조심조심 길을 걷고 있다.

맑고 밝은 햇살이 떠오르기 전
새벽 산길을 걷고 오르면
그래도 입에선 감사가 나온다.
어두운 산길이지만 예수님 부르며 같이 동행하니
맘은 피어있는 아름다운 들꽃처럼 환하게 피어온다.

저기 정상까지 걸어야 하는 힘이 솟아 나와 꿈꾸듯
청춘에 잠겨 있는 꽃들과 푸른 나무 속에
내 맘도 같이 어울리니 나도 청춘이다.
들꽃 하나 꺾어 입 맞추고 향기 맡으면 나의 청춘은 슬프지 않다.
아름다운 자유가 있어 더욱더욱 나의 황혼은
저물어가는 햇살처럼 더 밝고 더 강하며 익어간다.

하산해서 밭에 오면 푸릇푸릇 계절 따라 익어가며
주렁주렁 열매 맺어주는 채소 사랑이 있다.
음악처럼 흐르는 하루하루
사랑 베풀 수 있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같아
눈빛 하나로 맘을 읽을 수 있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같이 할 수 있어 외롭지 않다.

밭일도 즐겁게만 느껴지니 사랑은 힘이요 능력이요 감사니
나는 참 황혼의 꽃이다
황혼의 꽃을 피우며 순간순간 아름답게
그림 속 나를 보며 멜로디로 맘을 풀고
손으로 심어 키운 채소들과 함께 해주는
사랑이 있으니 나는 황혼의 꽃이다.

이외에도 풍성한 글과 그림을 담아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여심을 잡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소비의 80%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동차, 자전거, 스포츠 캠핑 분야까지 여성들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의 여성들의 생활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의 지위는 달랐습니다. 남성들과 동등하거나 남성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도 감당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겐그레아 교회의 여제자 뵈뵈였습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교회의 남쪽 항구도시였습니다.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에 가기 위해서 겐그레아에 들렸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나실인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복음이 전파하면서 겐그레아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뵈뵈는 이 겐그레아 교회의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일꾼은 구경꾼이나 방해꾼이 아니라 동역자입니다. 첫째, 부족함을 도와서 함께 보완합니다. 힘든 일을 구경하면 구경꾼이 됩니다. 둘째, 같은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방향이 다르면 열심히 할수록 방해꾼이 됩니다. 셋째, 사랑의 열기가 남습니다. 일꾼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남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유럽의 나체촌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목사님에게 소감이 어땠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난처한 질문을 한 사모님에게 “저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했다”고 대답합니다. 대답을 들은 사모님이 “과연 목사님이네”하고 수긍했다고 합니다.

뵈뵈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동역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복음 전도에는 직접 전도와 간접 전도가 있습니다. 직접 전도는 사도와 제자들처럼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직접 전도에는 길에서 복음을 전하는 노방전도, 가정을 방문하여 전하는 축호전도, 피켓이나 구호를 들고 전하는 시위전도가 있습니다. 간접 전도는 우리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생활형 전도, 치유나 상담, 구제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열매 전도가 있습니다. 이외에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전도대회, 기독교 문화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문화 전도, 연령별로 어린이나 어른들을 나눠서 전하는 전도축제가 있습니다. 뵈뵈가 어떻게 ‘후견인’ 역할을 했는지 로마서 16: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용되는 바’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소용되는 바는 헬라어로 ‘크레조’라고 합니다. 헬라어 ‘크레조’는 어떨 때 사용되는 말인지 누가복음 11장 5-8절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있는데 한 밤중에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친구야! 니 내한테 떡 세덩이만 꾸어 달라”고 말합니다. 이 친구는 여행을 하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에 당장 먹일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상점과 집안의 문은 굳게 잠겼고, 지금 아이들은 품 안에서 자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그 친구를 돌려보내야만 할까요? 우리 주님은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은 찾아온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간절히 요구’하기 때문에 떡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라도 간절한 사람의 필요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 ‘간절히 요구하는 것’이 ‘크레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비웃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9-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 떡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선물까지도 부어 주십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뵈뵈를 추천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로마를 가고자 했지만 성령께서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자 뵈뵈를 통해서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전하게 했습니다. 나이 많은 여인이 16장까지 기록된 로마서를 들고 고린도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로마까지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육로로 가려면 그리스 반도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만 로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해로도 험난한 파도와 암초와 태풍을 견뎌야만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뵈뵈는 로마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간절히 구하는 참된 복음을 위해서 로마서 말씀과 자매 뵈뵈를 함께 보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여러 곳마다 복음의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목숨까지도 내 놓은 동역자였습니다. 에베네도는 에베소에서 얻은 첫 번째 성도였지만 고린도 교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네도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사랑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교회 성도들의 문안 인사로 끝납니다. 이들은 복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서 아낌없이 ‘보호자’가 되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문안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서로 인사를 잘합시다.

가만 보면 세상도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회사 직원이 팀장과 세 번이나 눈이 맞주쳤는데 인사를 안 하더랍니다. 아침에 만나도 인사 한마디 없다가 볼일이 있을 때 갑자기 찾아와 할 말만 하고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러다가 혼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팀장이 말합니다. “아니 근데 왜 요즘 애들은 인사를 안하는 거야?” 그러자 직원도 돌아서서 혼잣말을 하더랍니다. “아니 근데 왜 인사를 강요하는거야?” 인사는 단순히 예절과 매너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문안 인사는 사랑과 관심을 담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인사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요새 밥은 먹고 다니냐?” 재밌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을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생각하고 서로 문안인사를 하면 너무나 귀한 인사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서로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문안인사를 해봅니다. 마태복음 6:31-34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 성도들이 복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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