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25일 주일 낮 설교<예수님이 배우신 순종>

정성주 0 4,078

제목: 예수님의 배우신 순종

본문: 히브리서 5:5-10절

<?xml:namespace prefix = o />

노트르담 대학의 종교사회학자인 크리스천 스미스교수는 지난 5년간 미국의 10대의 영적생활을 조사한 후에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청소년을 포함한 대다수의 10대 청소년들이 지닌 신앙을 ‘도덕적 치료주의 이신론’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도덕적’이란 말은 ‘착하고 훌륭하게’됨을 의미합니다. ‘치료주의’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순종을 배우거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주로 한사람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신론’이란 어떤 문제를 이 하나님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이 나와 동떨어져 있고 나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의미합니다.

스미스는 많은 10대들이 하나님을 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인식하는 이유가 대다수 미국 성인들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할 전능한 창조자가 아닌 사용가능한 하나의 장치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만 준비되면 무엇이든지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신앙을 말하고 믿음의 순종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한 시대를 천하를 호령하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정치가들의 명성은 한 때 일던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날의 과학자나 철학자나 영웅호걸들도 거품처럼 일어났다 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일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명성이 온 천하를 덮고 있으며 날과 달이 갈수록 오히려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신 그날의 장면과 오늘 이 시대의 우리와 거리는 2000년이라는 방대한 시간적 거리가 가로놓여 있지만 그러나 그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헤롯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고 빌라도가 그를 무덤에 가두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하늘의 영광과 최고의 자리에서 그 보좌를 베푸시고 좌정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인정하시고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성도들도 한없이 찬미하고 있으며 악인들은 전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철저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직분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기도의 교훈을 남겨 주셨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숭고하신 예수님께서도 단 한가지만은 배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오직 순종만은 배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배우셨는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얻으신 죽음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윈한 구원근원이 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구원근원이 되신다는 뜻은 무조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구원근원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생활이라 함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럼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순종의 생활에는‘희생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마4:20-22 19:27/ 눅5:11)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어부 베드로 안드레형제를 만났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즉시로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 요한의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들도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에서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직업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명백하게 희생이 동반 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복만 받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순종의 생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16:24 막8:34 눅9;23)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결단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는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모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내 자신도 삶의 목적도 목표도 누리고 있는 삶의 보람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으며 이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근원이되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8-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시지만 아들의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이상 그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셨으며 사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이상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 길만이 인간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알고 계셨지만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죄의 값을 지불하는 방법뿐이었습니다.(히2:10)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완전한 구주가 되심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이 세상에서 순종의 본을 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였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이 겪어 본 것 중에 가장 격렬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완전한 구세주가 된 것은 바로 고난의 십자가의 격렬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도 격지 않았던 엄청난 고통의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 구세주의 명칭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애 순간 순간 닥쳐오는 고난에서 순종을 자신의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의지로 뒷받침되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아버지여 내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대로 되기를 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 의지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우리들의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영접하는 자만이 그분이 순종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순종이 축복의 근원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지름 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손자가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그 때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손자가 숙제를 한다고 끙끙대면서 이것이 무엇이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예쁘고 귀한 손자 놈 왜 학교 갔다가 와서 낑낑 대는고 하고 말했습니다. 아참 할아버지는 잘 알겠다.

할아버지 5대양 6대주가 뭐예요 응 그래 이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마 그것은 첫째 오대양은 김양, 이양, 박양, 최양, 오양이라고 쓰면 되고 6대주는 맥주, 소주, 양주, 포도주, 동동주, 그리고 막걸리로 쓰면 된단다.

이 말은 들은 손자 녀석이 야호 신난다. 할아버지가 숙제를 다 해주셨다.

이튿날 학교에 간 손자가 선생님한테 혼이 나서 시무룩하게 집에 돌아 왔습니다. 이것은 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자야 이 할아버지가 어제 잘못 가르쳐 주었구나 6대주 중에 막걸리를 탁주로 고쳐야 하는 것을 깜박했구나? 내일 학교에 가거든 막걸리를 탁주로 고쳐서 내거라 ㅎㅎㅎㅎㅎ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십니다.(삼상15:22)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많은 핍박과 조롱 속에 살아갈지라도 자신의 안일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순종을 통해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습니다.”(10절)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께 순종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신앙생활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조롱을 받으신 것처럼 남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주목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두려워하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더 큰 주님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혼자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순종의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순종은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순종을 통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전달자가 됩시다. 이제 십자가의 전달자 찬양으로 예수님의 순종을 배우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양입니다.

[십자가의 전달자]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 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 만 사시는 것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 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오직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에게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갑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사순절 다섯째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들도 주님의 순종을 배우는 한 주간을 시작하는 은혜의 주님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