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1일주일 설교 <하나님의 훈련 방법>

정성주 0 4,916

제목: 하나님의 훈련 방법
본문: 신명기 32:9-14절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만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다르게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담을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에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마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한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보았고 알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기가 막힌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아마 표현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배려하신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눈동자를 보호하시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참 좋은 하나님입니다. 백번 들어도 좋고 천번 만번 들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의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 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 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절 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의 기능은 전자동 시스템으로 구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눈꺼풀만 해도 완전 자동 개폐식이어서 유사시에는 즉흥적으로 눈꺼풀이 덮이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샘을 만들어 언제나 안구 운동에 지장이 없도록 촉촉하게 습도를 조절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것은 자기 눈을 보호하듯 철저하게 완벽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체 가운데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신경조직, 두뇌 판단, 눈 동작이라고 합니다.

또 피곤할 때에 눈에 눈꼽이 끼는 것도 우리 눈 안에 불순물을 밤 새 씻어서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체는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어떤 얼굴 쪽으로 공격을 받으면 눈을 감든지 손으로 눈을 가립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눈을 묘하게 만드셨고 소중히 다루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우리를 너무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완전무결하게 보호할 것을 보장하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하나님으로 바뀌신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성경 본문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모세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독수리 어미에다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날마다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것만으로 전부를 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를 그렇게 보호만 해주신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주 마마보이 같이 쓸모없는 또 아무 실력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다. 어떤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다루듯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대단히 값진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독수리의 이미지를 가진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면 은혜를 받아도 우리를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하듯이 기르신다면 별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달가워하지 않는데도 우리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엄하게 훈련시키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실감 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을 독수리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어떻게 훈련시킵니까?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듭니다. 아무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곳에다가 둥지를 틀고 자기의 털이나 다른 부드러운 물질로 폭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집은 매우 튼튼합니다. 새끼들은 안심하고 거기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파란 창공이 올려다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둥지에서 새끼들은 날마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새끼들은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어리둥절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계속 펄럭이며 입으로 새끼들을 둥지 가장자리로 마구 밀어내기도 합니다. 새끼들은 어미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보금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조류학자의 말에 따르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폭신폭신한 깃털 침대를 전부 밖으로 물어 던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바닥이 딱딱하니까 새끼들이 견디다 못해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가시나무 가지를 보고 그 보금자리에다 집어넣어 새끼들이 찔리도록 한다고 합니다. 결국은 새끼들이 따뜻한 보금자리에 계속 누워 있었으면 하던 생각을 단념하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기어 나오고 맙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려움이 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아'하며 꿈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가 원하지도 않던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날개로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신다고 판단해도 됩니다. 이때가 하나님이 몹시 가까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몸을 묻고 있던 자리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되었다면 두 손 들고 예수님 앞에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어지럽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인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가끔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우리 속에서 태평스럽게 잠만 자듯이 우리가 육신의 잠에 깊이 취할 때가 있습니다. 대개 세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러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영적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깨우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평안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때입니다. 흔히들 이것을 '징계'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어려운 시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져 있던 자리에서 빨리 나오라고 깨웁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 두 번은 모두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징계를 받아 본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이런 분들이 설교를 잘 듣고 다른 사람 형편도 압니다.

이것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용광로에서 귀한 그릇으로 구워진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우리들로 온전하고 구비한 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혹시 이런 환경 가운데 있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빨리 그 자리에서 나오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피로 값 주고 사신 보배로운 자녀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빨리 나오라는 경고가 당신에게 다가온 어려움은 아닙니다. 잠을 깨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이웃에 있는 일본처럼 편안하고 돈 잘 벌고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예수님 믿고 돌아오는 사람, 타락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자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요즘 십대들이 왜 그렇게 많이 자살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너무 잘 먹고 잘 입고 즐기다가 그 이상의 무엇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은 정신병자가 되고 나중에는 죽음을 택합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이제 둥우리에서 기어 나오면 어미 독수리는 아주 높은 곳까지 긴 날개 위에다가 새끼를 얹어 고공으로 올라갑니다.

새끼는 잔뜩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가 새끼를 사정없이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나 죽는다!]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미는 공중에서 새끼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기만 합니다. 조금만 지체하면 새끼가 당장 바닥에 부딪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쏜살같이 내려가서 힘 있는 날개로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이런 일을 새끼가 제 힘으로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이것과 흡사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 교회로 나왔었는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는 어려운 문제가 끊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것은 안 들어주시고 1년, 2년을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고쳐 주실 것 같은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요?

능력이 없어서 그러실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목적을 두시고 공중에서 우리를 반복해서 떨어뜨리시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회의에 빠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지쳐 버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다루시는 것입니까? 높은 하늘을 힘 있게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길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생활이 힘들고 고된 일이 자꾸 반복되면 하나님이 공중에서 떨어뜨리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신없이 추락할 동안 누가 지켜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새끼 독수리가 비록 어미 같지는 못하지만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써 먹지 못해 그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날개 짓을 하게 되면서 날개가 펴지고 날개를 위 아래로 저으면서 그 힘으로 공중을 날게 되고 자꾸 연습하면 자유로 공중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독수리는 새 중에서 왕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독수리가 그 새끼를 부딪치게 하여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망하도록 방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큰일 났구나!'하는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계속 연단시키지만 절대로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겉으로는 전혀 소망이 없어 보이는 환경인데도 이상하게 하루하루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날개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독수리 새끼가 여러 번 떨어지는 훈련을 통해서 결국은 스스로 날 수 있게 되듯이 우리 역시 어려운 고통과 역경을 수없이 거치는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은 한 순간에 금방 자라거나 완성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철야기도를 이틀 사흘 했다고 해서 우리 믿음이 금방 완성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독수리의 날개와 같습니다. 날개에 힘이 생기려면 시간과 연단이 필요하듯이 믿음 역시 강한 힘을 가지려면 시간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험한 경로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진 신앙의 날개는 더 튼튼합니다.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면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은 편입니다. 그의 믿음에서 매우 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해도 여전히 날개를 펴서 날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야합니다. 성령께서 그 현실에 바른 깨달음을 주셔야 바른 믿음을 가지고 날개 짓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드디어 독수리 새끼는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날기를 시작합니다. 새끼가 날기 시작하면서 그는 어미가 나르는 데로 따라 갑니다. 높은 고공으로 힘 있게 솟구칩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비로소 독수리다운 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달고 높이 날아오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고공을 나르는 믿음의 생활입니까? 바로 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만난 현실이 너무 어려운데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네게 있는 그 믿음의 날개를 사용하라” 하십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 훈련 받지 않았느냐” 믿음의 높은 하늘을 날아 오르는 독수리 날개를 펼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믿음의 날개를 가지고 더 높이 날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차원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의 훈련의 과정이 있다면 우리는 감사하면서 잘 견디어야 합니다. 힘찬 믿음의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 하늘을 날아오르는 신앙인이 되기까지 인내하면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힘찬 믿음의 날개를 유유히 펄럭이며 스스로 높이 날 수 있기까지 당신을 훈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주품에 찬양을 드립니다.

주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 보리라

주님 안에 나 거하리

주 능력 나 잠잠히 믿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 보리라.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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