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28일 주일 낮 설교<어떻게 살 것인가?>

정성주 0 4,473

제목: 어떻게 살 것인가?
본문: 빌 1:15∼21

사도 바울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평소에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협력하였던 빌립보 교회에 성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복음전파가 끝나지 않았느냐? 하는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여, 당신들이 나에 대하여 그런 사랑과 존경을 갖게 된 것을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 하여 전도의 문이 닫힌 것이 아니고 복음의 진보가 끝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감옥에 갇힘으로써 복음전파가 더 확산될 수 있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나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여러분들에게는 혹시 근심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더 없이 좋습니다.

정말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바울은 기쁨을 유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도 바울은 세상 말로 말하면 못 말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몸이 자유로울 때에는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그 몸이 감옥에 갇히면 편지로 전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을 붙들고 전도합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 살아도 전도, 죽어도 전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생명 살리고 영혼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일회적인 삶을 삽니다. 사람이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가 실수하면 그 종이 찢어버리고 다른 종이에 옮겨 그릴 수도 있고, 운동선수가 본 시합에 나가기 전에 몇 번 정도 연습게임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뒤에 본 시합장에 나가서 시합할 수 있지만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고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일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쁘게 살아야 됩니다. 또, 그리스도로 인한 즐거움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의 명예, 지위, 권세를 가지고 당시의 종교 최고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으로부터 인정받는 유대교도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선생 밑에서 철학과 수사학, 율법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그래서 그는 율법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고, 좋은 가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참으로 유능한 젊은이라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을 장래 재목감으로 지목을 받았던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못마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거짓말하고 다니니 그래서 순진한 유대교도들에게 다 예수를 믿게 해서 우리 유대교를 무너뜨리다니 이것은 이단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공문을 받아서 예루살렘지역 초대교회 120명 중에서 최초로 뽑은 성령이 충만한 7명의 안수집사 중 하나였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집행하면서 스데반집사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 기쁨이 넘치는 천사의 얼굴 모습을 보고 마음은 늘 불안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유대교를 우습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울이라는 청년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메섹(다마스커스)이라고 하는 도시에 피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많은 부하직원들을 거느리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다마스커스 도시 정문에 도착했을 때, 낮 12시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공중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그에게 비춰 주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땅에 쓰러졌습니다. 눈은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공중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예수가 살아서 바로 자기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그는 그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행원들의 손에 끌려서 어느 한 집으로 들어가서 삼일동안 금식하면서 엎드려서 기도하게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다마스커스에 살고 있는 경건한 기도의 사람 아나니아라는 성도가 찾아왔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니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박해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사울(큰 자)에서 바울(작은 자)이라고 개명해 주면서 너는 임금들과 모든 이방사람들에게 네가 만난 나 예수 복음을 전하여 멸망해 가는 영혼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복음전하는 일을 생애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며 살면서부터 그는 전에 없던 기쁨이 그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습기 가득한 어둡고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절 말씀에 보면, 그가 기뻐한 것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항상 기뻐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10절 이하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히브리 말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그 카리스란 말에서 영어의 ‘그레이스’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원래 이 카리스라는 말은 ‘매력을 느낀다.’ ‘참으로 좋아 보인다.’ ‘아름답다’ ‘기쁘다’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아름다워집니다. 표정이 보기에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눈에 나타나 보이는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밝은 표정, 웃은 얼굴, 열린 마음, 그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굳은 표정, 어두운 얼굴의 모습, 그것은 닫혀 있는 마음의 모습이거든요.

사람들은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열려 있어야 드나들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은혜 받은 사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는 마음, 자신 넘치는 그런 표정, 환한 모습, 그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울하고 침통하고 안정되지 않고 허겁지겁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겁먹은 표정, 낙심된 얼굴, 그런 표정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있겠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감옥에 있는데도 그는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할 때 월요일은 행복한 날, 화요일은 복된 날, 수요일은 즐거운 날, 목요일은 유쾌한 날, 금요일은 좋은 날, 토요일은 상쾌한 날, 주일은 기쁨이 충만한 날, 언제나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인데 다른 서신에서 발견할 수 없는 반복된 낱말이 하나있습니다. 17번이나 반복된 낱말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가 믿는 예수님 나도 믿는데 왜 그 분은 감옥에 갇혔어도 기쁨이 충만했는데 나는 자유의 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면서도 기쁨이 없는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환경을 탓하면서 사는 불신자의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남이 경험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빌립보서 3:3절 말씀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성경번역으로는 봉사라는 말로 기록되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서비스 워쉽‘(Service worship) 예배예요.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 진실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일을 최상의 가치로 아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에요.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요. 예배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고 소망을 얻습니다.

어느 교회에 홀로 된 젊은 권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에게는 장래가 촉망되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이 고 3이 되자, 아들을 붙들고 "아들아 교회는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 다녀도 되니까, 금년 한 해만은 공부에만 전념을 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어떻겠냐?" 하고 말을 했습니다. 아들은 엄마 말대로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주일날만 되면 마음이 불안하고 공부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학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 상처는 너무나 커서 이 학생이 교회에 출석도 포기하고 술을 마시고 세상으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어머니 권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자연히 칭찬이 있을 수 없지요 아들은 집에 있기도 들어오기도 싫어 졌습니다. 엄마의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자 또 바깥으로 뛰쳐나가 술을 마시고 무단횡단을 하다가 그만 자동차에 치여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교회장로님이 급히 찾아갔습니다. 문상을 하는 가운데 권사님이 장로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내 아들은 내가 죽였습니다. 제가 그 아들을 주일날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이제는 교회 나가라 했더니 언제는 나가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나가라고요? 싫어요.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대학에 떨어졌다고 친구들이 비웃을 건데 싫어요. 그러면서 화를 내고 술 마시다 이렇게 변을 당했습니다."하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말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기쁘게 살아야 엔돌핀이 나와서 건강이 넘치잖아요. 사람이 충격 받고 고민하고 그래 보세요? 건강이 단번에 나빠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를 다 맡기라”고 했지 밤잠 못 자고 고민하란 말은 단 한 절도 없는데 왜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환경이 어려워서 고민하기보다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고 성령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목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 보려는 그런 멋있고 아름다운 목표를 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아쉬워하면 세월이 되돌아옵니까? 하루 가고 이틀 가면 동안이 늙어 가면서 누구나 가야 하는 죽음의 길, 거절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살아계신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매일 매일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로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쭉 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 속에서 구구절절 너는 이렇게 살아라. 응답하실 것입니다.

응답하신 대로 살아 보십시오. 주님이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육체의 강건함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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