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19일 주일 설교 <제목: 상 받을 사람>

정은아 0 417

제목: 상 받을 사람

마태복음 10:40-42


지금 러시아 소치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명장면들을 보면서 국민들이 환호하고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박승희라는 여자 선수의 가정입니다. 박세영, 박승주, 박승희. 삼 남매가 이번에 유일하게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이번 올림픽에 출전 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매우 드문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작은 일에 전념을 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승희 선수가 500m 결승에서 선두로 앞서 가다가 실수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출발부터 맨 앞에서 달리니까 누가 봐도 금메달입니다. 결승점이 바로 눈앞인데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금방 일어났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달리려다가 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달렸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14일(한국시간) ISU(국제빙상연맹)은 공식 홈페이지와 페이스 북을 통해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500m 동메달리스트 박승희와의 인터뷰를 게재했습니다.


박승희는 13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벌어진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선에서 54초207로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특히 이날 박승희의 레이스가 빛난 이유는 2위로 달리던 엘리스 크리스티(영국)가 넘어지면서 박승희와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까지 빙판에 미끄러졌지만, 다시 일어나 레이스를 이어간 박승희는 동메달을 따낸 것에 대한 보도입니다.


박승희는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을 회상하며 "머리속에 딱 한 가지 생각은 빨리 결승선까지 도달한 것 뿐이었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근성이 묻어나는 발언을 전했다.


이어 ISU는 "박승희가 우승하지 못해 아쉽지만 동메달 역시 매우 귀중하다. 넘어진 순간, 앞으로의 일만 생각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장차 상 받을 사람은 누구 일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Ⅰ. 작은 자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천국윤리의 일차적 대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소자를 뜻합니다. 마 25:40에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마 25:45에서는 단순히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네 형제 중에"란 말씀은 "천국 형제"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할 것을 교훈 합니다.

"천국 형제"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마 12:50)요,

본문 42절에도 "소자"란 말씀이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린 아이"를 가리킵니다(마18:6, 10, 14).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계층인 노동자, 소작농부, 목수, 석수, 세리, 죄인, 여자, 아이들을 다 포함하는 사회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고백하여 성도 중에 말미에 처한 자신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란 신앙적 의미로 믿음의 형제를 뜻합니다.

믿음 때문에 낮아진 사람들, 믿음 때문에 천대와 멸시와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의 윤리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믿음의 형제나 믿음의 가정들을 우선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무시, 멸시 당하는 소외계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양심이요, 빛이요, 소금이라면 순수한 사랑의 수고가 시행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Ⅱ.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마태 25:35-36에 보면 선행을 한 사람들은 믿는 이들의 육신적 고통과 고난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육신적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수고인 것입니다. 이런 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베푸는 사람도 또한 그 사랑을 받는 사람도 그 선행을 기억치 못합니다. 이런 일은 칭찬이나 박수갈채나 상급이 당장 따라오는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요 그래서 망각하기 쉬운 일입니다.

사람 앞에 드러나는 수고가 아니라 은밀한 사랑의 수고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기분에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의 영광을 바라보며 선행을 베푼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리라"(마 6:3-4)고 교훈 하셨습니다. 이 같은 원리에 순종하는 은밀한 수고는 곧 주님 자신께 베푼 수고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자 하나에게 이 같은 은밀한 수고를 베풀어야겠습니다.


2. 보상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감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자들인 오른 편의 양무리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잘했다" 칭찬하실 때에 "언제 내가 그렇게 했습니까?"(마25:37-39)라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타산적인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와 행인,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사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즉시 사랑의 수고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 보상을 요구하거나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도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사랑의 씨앗을 뿌린 종류대로, 분량대로 보상을 실시하십니다. 이것은 곧 천국백성에게 주어지는 면류관들입니다. 반면에 지상의 윤리와 규범으로 만족하는 왼편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비행을 책망하셨을 때

마태 25:44에 보면 오히려 주님께 따지며 "언제 내가 그 같은 어려운 형편을 보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지극히 타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사랑하는 자들이요, 선물을 받아야 선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이 전혀 없는 거지에게는 한 닢의 동냥도 기피하고, 잔소리, 욕 그리고 저주를 뱉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같은 사람들은 "영적 계산법"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고 보상의 원리를 밝혔습니다.


천국백성은 보상을 계산하지 않고 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 보상을 시행하시되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줍니다." 이는 예산을 초월한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보상입니다. 또한 아무리 적은 사랑의 수고라 할지라도 반드시 풍성한 상급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상급을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웃의 평범한 육신적 고통에 참여하면 주님께서 만 배로 축복하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시며 소자 곧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의 작은 사랑의 수고를 다 하시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보상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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