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1011일 주일설교 말씀

정은아 0 4,036

제목: 믿음의 세 단계

본문: 요한복음 4:46-54

 

"믿음의 주소" 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앙고백서를 통해 "나는 은혜도 신앙군 안식면 행복리 7번지에 산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나의 주소는 전도도 즐겁군 믿음면 기쁘리 7번지" 라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다른 어떤 일보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 기쁘고 즐겁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믿음의 주소"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나의 믿음의 주소가 "살기도 괴롭군 죽으면 편하리"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믿음의 주소를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모양의 어렵고 슬픈 일,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비극적인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 같은 일들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배운 사람이든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지, 신자이든지 비신자이든지, 누구든지 모두가 당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같은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 같은 재난들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이란 사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생이란 고통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시작된 처음 9개월 동안은 따스하고 안온한 어머니의 태 안에 있다가 갑자기 어린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 번째 행동이 울음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인생이란 고통과 슬픔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울음으로 태어난 어린 생명은 잠시 동안 어머니에 의해서 돌봄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자라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를 받쳐 주었던 엄마의 버팀목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만 의존할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먹고 입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생활비를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자기가 계획한 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숱한 낭패도 당하게 될 것이고, 의지했던 물질이나 사람들도 자기 곁을 떠나게 되는 마음 아픈 고통도 당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질병의 고통이 있습니다. 결국 자기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죽음이 닥쳐올 것이고 또한 자기 자신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46-47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오늘은 어떤 왕의 신하의 믿음을 본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어느 날 주님은 갈릴리 가나에 가셨습니다. 그 곳은 주님이 혼인잔치 집의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셔서 기쁨을 선사한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을에 가셨을 때 가버나움에 사는 어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한 가지를 열심히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지금 죽어 가고 있으니 빨리 자기 집에 오셔서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하의 간청은 다급하고도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한 신하의 요청에 주님은 냉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물론 이 말씀은 비단 신하만이 아니라 거기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요,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표적을 더 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3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에 오해하거나 언짢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요구를 계속해서 아뢰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렇게 계속 간구하는 신하에게 주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이 한마디 말씀을 듣고 그 즉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그는 자기 집에서 오는 종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큰 소리로 주인의 아들이 나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는 놀랐습니다. “아니 언제 나았느냐?”, “어제 제7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신하는 그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제7시는 바로 주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임을 알았습니다. 신하는 집에 돌아와 완전히 나은 아들을 보고서 주님께 감사하고 온 식구가 다 주님을 믿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신하의 모범적인 믿음을 우리 모두가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아직 알지 못하고 단지 시골 나사렛 가난한 동네 요셉 목수의 아들로 더 많이 알려진 때였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냉소하였습니다. 이 말은 네가 말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기에 나를 그에게 인도하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이 같은 때에 왕의 신하는 정중히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유대 관원 니고데모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낮에 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관원이란 신분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나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 신하는 훨씬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낮에 친히 찾아와 간청하였으니 그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신하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가나까지의 거리는 35나 되는 거리였습니다.

도보로 걸으면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하룻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같은 행동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동기는 죽어 가는 아들을 살리겠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발로라고 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합니다. 더욱이 자식이 죽어 갈 때 부모는 자식을 살리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존심도 버리고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하에게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열렬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원천리 신분도 체면도 버리고 근 백리 길을 나사렛 목수의 아들에게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라면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주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에 자존심이 가로막고 있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신분, 직위, 체면, 위신, 입장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를 깨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며 구원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히브리서 111말씀대로였습니다.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신자들은 실상으로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성이나 경험, 과학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믿음대로 살아갑니다. 믿음대로 일합니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큰일을 하고, 작은 믿음 가진 사람은 작은 일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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