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설교말씀

정은아 0 4,765

제목: 처음 사랑 

본문: 2:1-7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에베소는 당시 로마의 속해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중에 가장 큰 도시였고, 항구도시요 또 육로로는 중요한 주변 모든 도시와 거의 다 연결이 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리고 편리한 교통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기가 편리해서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매년 한차례씩 운동경기가 열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교통, 상업, 운동 경기 등을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미의 여신인 헬라의 아데미(로마의 다이아나) 여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도시였고 길이 425m 너비 220m의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여사제들이 종교적 행위로 창녀의 역할을 수행하던 매우 타락하고 혼란스런 도시였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회심한 사도 바울에 의해 에베소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에 사도요한에 의해서 주님의 칭찬과 책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먼저 2-3절을 읽어보면 "알고", "아노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시록 2-3장에서 일곱교회에게 편지하시면서 주님은 모두 7"안다"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그때마다 모두 헬라어로 '오이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이 "안다"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헬라어의 "기노스코"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오이다""기노스코"는 둘다 "안다"라는 듯이긴 하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의미입니다. "기노스코"후천적인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오이다란 단어는 원래부터 알던 것, 또는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한번에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모든 상황을 누구에게 듣거나, 글로 읽거나 소문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이런 후천적인 학습을 통하지 아니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완벽한 하게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서 무엇을 알았을까요? 2절에 "행위""수고""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는 행위라고 번역을 했는데 말이 헬라어 원문에는 "행위들"이란 복수로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실천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것도 한가지의 실천이 아니라 여러 행함이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행함 없어 손가락질 받는 교회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행함이 있다는 말은 그 행함 자체가 그저 하는 척 하는 수준의 교회가 아니고 그들의 행함이 '수고'의 차원에서 봉사하고 섬긴 교회였습니다. 수고란 말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들이 얼마나 강도 높은 실천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적당주의로 대충 대충 하는 실천이 아니라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땀 흘리는 실천이었습니다. 온 몸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강도 높은 수고를 한, 두 번 하다가 그만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인내가 있는 교회, 지속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시작만 거창하게 해 놓고 끝은 흐지부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쩌다가 기분 내키면 열심히 하고, 기분 나쁘면 그만 두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평안할 때 실천하고 고통스러울 때, 회피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2) 말하는 인내란 모든 박해와 유혹과 가난과 온갖 방해 속에서도 계속된 실천이었음을 보여 주는 말인 것입니다. 더욱이 3절을 보면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라고 했으니 인내의 동기가 인간적인 야망을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이렇게 땀이 있고 열심히 있고 시종일관 주님을 위해 참된 실천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올바른 행위가 있는 교회라고 할 만 하지 않습니까? 보통 교회들은 이런 행동이 강한 교회일수록 올바른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에베소 교회는 정통 행위 위에 정통 교리까지 갖춘 교회였습니다. 원래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에 세운 교회였고, 훗날엔 디모데가 목회를 하였으며 마지막엔 사도 요한이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교리적으로 얼마나 든든히 선 교회였겠습니까? 그래서 2절을 보면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니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단을 막아 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수호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악한 자들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6절의 "니골라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원래 니골라는 초대교회 당시의 일곱집사 중 한사람으로 후에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에 빠져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이 사상은 영과 육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어서 육체는 영혼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음란을 행해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초대교회의 이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 위에 서있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올바른 교리로 비춰봐서 이런 이단의 사상을 폭로하고 교리를 수호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교리를 동시에 가진 보기 드문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첫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책망은 아마 요한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 별명이 '사랑의 사도'라 불릴 만큼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목회한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주님께 책망을 받는 것을 보고는 아마 몹시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첫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5절 말씀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첫사랑이란 바로 "처음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기억해 본다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어떤 교회였습니까? 20장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설립자인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밀레도에서 배를 타기 직전에 자신이 피와 땀으로 세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모웁니다. 그리고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로마로 끌려가 순교의 길로 가는 마지막 길임을 밝히고 애달픈 석별의 정을 나누며 고별 설교를 합니다. 그때에 20:37-38을 보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가 서기 56년경 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가 서기 96년경이었으니 그때로부터 40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40년 동안 에베소 교회는 바로 이런 첫사랑의 아름다운 행위들을 버리고 변질되어 갔던 것입니다. 은혜 받은 초기에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주님의 말씀이 갈급하여 기쁘게 받아먹고, 주님을 나의 생명,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전부로 여겼던 삶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강렬한 사랑의 열정이 세월과 함께 시들고, 파릇파릇한 새싹 같은 순결한 사랑이 어느새 덤덤하고 무감각한 사랑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첫 은혜 첫 믿음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부간에 갈등의 원인이 바로 첫 사랑을 잃어버려서 생깁니다. 처음에는 죽고 못 산다고 해놓고 나중에 와서 싫다고 하냐구요?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는 예쁘다고 해놓고 크면 밉다고 해요 왜요 내말을 안들어 준다구요? 이 모든 것이 사랑 때문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예수님이 문 앞에서 돈을 주십니까? 아니지요 주님 사랑 때문에 오지요 나를 위해서 조건 없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그 큰사랑 때문에 오셨지요 모든 문제는 사랑이 해결합니다.

 

그러면 대책은 무엇일까요?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의 성경은 번역이 좀 어렵게 되었지만 원어상에서는 이 구절이 분명하게 생각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는 명령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하던 열정을 결혼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대학 들어가서, 아니면 취직하고, 아니면 출세하고, 아니면 목사 되고 장로 되고 집사 되고, 권사 되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사하고, 돈 벌고, 아이 낳고 새집 사고 승진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들이 이 첫사랑을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첫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하게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서 기억해 내면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곡을 쓰게 된 배경입니다> 토마스 도르세이(Thomas A Dorsey)12살부터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돈을 벌었습니다.1925년 네티 하퍼(Nettie Harper)라는 여인과 결혼 후에 교회에 나갔고, 그리고 영적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1932년 시카고 필그림 침례교회에서 찬양대 지휘를 맡게 되어 40년간 계속했습니다. 1932년 가을 "도르세이"는 만삭된 아내를 집에 남겨두고, 초청 받은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리는 부흥집회에 갔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려는 순간 전보가 왔습니다. 시카고에 사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보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도르세이는 찬양 사역을 끝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인은 벌써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뱃속에는 얼굴을 보지 못한 아들이 있었습니다"그 전보를 받는 순간 집에 왔더라면 부인의 음성을 들었을 것인데" 하고 도르세이는 그 부인을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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