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예배 (2017. 2.12. 주일 예배)

최고관리자 0 4,189

변화된 예배.

12:13

 

이번 선교여행은 저에게 참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익숙하게 잘 아는 히말리야 산맥의 상징되는 전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해발 8,848m 그리고 8km가 넘는 전 세계 14개 산 중에 8개를 가지고 있는 네팔이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산악국가입니다. 한번도 외국의 침공을 당해 식민지가 된 적이 없는 나라 그리고 또 하나의 특이한 것은 새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새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 새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856종의 각종 새들이 날아다니고 나라 전 세계 조류의 약 10%가 이 네팔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문화 유산을 7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70여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고 인구가 3,3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신은 33천개라고 합니다. 종교는 인도의 영향으로 80%가 힌두교 15%가 불교 3%가 이슬람이고 기타가 2%인데 그 중에 기독교가 0,5% 정도입니다. (포카라에서 여인의 과일 사건 소개)

카투만두에 정통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이 있었습니다. 힌두교 사원은 죽은 시체를 사원 안에서 화장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부자가 죽으면 장작을 많이 놓고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장작을 조금 놓고 시체를 그 위에서 태웁니다. 하늘로 연기가 치솟고 시체가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고약한 냄새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저에게는 혐오감이 들지만 그들은 늘 익숙한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네팔의 현실은 제가 어렸을 때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별로 낮설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960년도와 같은 환경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처음 왔을 때에 저와 같이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나 바로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팔에는 불교의 부처(붓다)의 탄생지기가 있는 곳입니다. 룸비니라는 곳인데 그곳에는 세계의 불교들이 자기나라 사찰을 지어놓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이스라엘을 성지로 알고 찾아가는 것처럼 세계 불자들도 이곳을 성지로 알고 많이 방문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몸을 힌두교 사제 앞에 내어 놓고 행사를 진행하는데 매우 진지하게 앉아 있습니다. 사제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앉아 있는 머리에서 이들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사제나 앉아 있는 분들이 저에게 관심을 두거나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행사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구약의 제사가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아 하 성경의 제사가 이렇게 드려졌구나, 번제의 의미를 장작더미를 놓고 그 위에 재물을 놓는데 그것이 양이든지 소든지 염소든지 모두 다 태워서 드리는 향기가 나는 제사 제사장들이 칼로 제물을 토막을 내어서 완전히 태우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제사를 폐하시고 이제는 우리가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얻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내 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완전한 제물이 되는 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힌두교의 시바신은 여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신을 그림으로 보면서 믿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림으로나 형상으로 보지 않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상과 참신이신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리거나 새겨서 만들지도 말라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 왜 분별력이 필요합니까?

불교 사원에서도 사제들이 결혼식을 집례하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이 들러 앉아서 그들에게 주문을 외우고 꽃을 뿌려주고 붉은색을 이마에 발라주고 요구르트 같은 것을 머리에 뿌리고 진지하게 들러 앉아서 사제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절간에 개들이 개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많은 개들이 누워 있습니다. 이유는 개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들이 떼를 이루어 다닙니다. 더럽기가 짝이 없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생명체가 있으며 신이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서 소가 지나가면 차들이 멈추어 섭니다. 신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큰 개들이 누어있었다면 다 된장을 발랐을 것입니다. 작은 개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인도에 오랫동안 의료선교로 나가있던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낙네가 자기 아이를 업고 헐레벌떡 병원으로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가 하고 진찰을 해 보니 자기 병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큰 병원으로 가야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우니 서둘러서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마음이 답답해서 "아니 아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인데 소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물었더니 "당연히 소지요. 아이는 2-3년 후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사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럴 때에 아이와 소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아이라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그 여인에게는 오히려 소가 더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지금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생각이 우선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소중한 아기의 생명도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마저도 쉽게 세상에 내어주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소가 신입니다. 시골에 가면 소가 집집마다 한두 마리가 꼭 있습니다. 소고기를 잘 먹지 않는 나라입니다. 주로 닭고기를 많이 먹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도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도 분별력 있게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하여 예배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더라도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해야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뻐하시는 봉사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는 무수한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냐 불의냐, 진리냐 거짓이냐, 행복이냐 저주냐,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나를 위한 것이냐, 거룩이냐? 세속이냐 이런 많은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바른 선택을 하려면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했을 때 하나님을 주저 없이 택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지 하나님보다는 우상이 더 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고 성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여 망설인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선택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통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 예배를 통하여 얻습니다.

이 시대는 분별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분별력 없이는 우리를 유혹하는 악령에 쉽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영적인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절입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점점 강해집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배란 "우리의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에게 있도다." 라고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나의 삶의 기준이 되심을 생각하면 영적인 분별력을 얻습니다.

 

- 몸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가 영적 능력을 회복하고 영적인 분별력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주원인은 우리의 몸에 있습니다. 우리 몸은 부패하기 쉽고 죄와 밀착하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타락하기 쉽고 또 이렇게 타락한 몸을 가지고 살다보면 영적인 분별력은 온데간데없고 육적인 것만 남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라" 신령한 자만이 신령한 것을 분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멋대로 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이 세대는 자꾸 우리로 하여금 어울려라, 닮아라, 본받아라, 따라라, 이렇게 살아야 된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암시하고 주입시켜 주고 있습니다. 신문, 방송, TV드라마, 영화, 인터넷, 이 모든 매체들이 암암리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여러분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신문을 보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과연 이 기사와 방송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있는가를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뒤에 움직이고 있는 악령의 세력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점점 악령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는 때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세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악령에 미혹되어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의 싸움은 성령과 악령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지 못하면 이악한 세대에 휩쓸려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세요. 악령들이 교묘히 조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악령의 지시에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가시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회에서 동성애 법과 차별 금지법을 통과시키려고 합니다. 이법이 통과되면 이단들은 더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법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으시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한 주간 동안 사시기 바랍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