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5일 주일 낮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눅2:8-20]

정성주 0 4,743

 

제목: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본문: 누가복음 [2:8-20]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교회 학교 선생님이 자기 학생들을 놓고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희들 이번 크리스마스 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니?" 이 말을 듣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받고 싶은 선물을 말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없는 아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너는 뭘 받고 싶니?" 그러자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사진을 꺼내서 보는데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아버지가 사진 속에 있지 말고 그 속에서 나오셔서 나를 만나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울더랍니다. 선생님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안아 주고 기도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크리스마스란 바로 그것이다. 사진 속에서 그냥 웃고 있는 아버지가 아니고 "애야 나도 너를 사랑하고 보고 싶었단다" 이렇게 말씀하며 뛰어 나온다면 얼마나 놀랍고 기쁠까? 이 사건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란 높은 보좌에서 팔짱을 끼고 저 아래 인간 세상을 쳐다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이 죄 많은 곳에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당신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를 향하여 약속하신 사랑을 눈으로 보여준 기쁘고 놀라운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가를 생각해 왔고 자기의 존재 이유를 신과의 관계 속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인간은 천박하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달으면서 신과 인간과의 한없는 상대적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것이 일반 종교입니다. 그래서 도를 닦고 경전을 외면서 덕을 쌓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신에게 나가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신을 만날 수 없음을 인간 스스로가 고백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소외 분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는 그 불안함. 철학적으로 말을 바꾸면 우주적 통일성을 찾지 못한 인간의 탄식이 역사 속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 이원론적 대립 현상. 이 대립 속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딜레마.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소위 통합적 세계관. 그것을 가져 보려고 하는 것이 철학의 목적입니다. 특별히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한 평생 고민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인간과 하나님의 분열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만날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됩니다.

 

 

그럼 이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는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인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 그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촉점을 발견합니다. 소위 이방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혹은 정반대로 신이 인간의 저속한 모습을 그대로 닮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해결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보세요.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을 찾아서 만나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 모습입니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진무한이라고 명명합니다. 참된 신이란 유한한 인간을 만나 주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이방의 신들은 인간과의 차별을 극대화해서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드는 가상의 신들입니다. 이들을 철학적인 용어로 악무한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진무한이며 진무한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그의 철학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온 세상의 모든 역사와 비밀을 푸는 마스터키이며 인간이 이해해야 할 가장 큰 신비는 성육신 사건이라고 그는 철학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눈에 보이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으로 오셨다"고 하는 그러한 확증을 나타내시는 일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제한된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죄 많고 무지한 백성의 한계를 깨시면서 그 속으로 파입하는(in breaking) 사건! 그것이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세상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만남이 있고 하나가 이루어집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만 두 존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쪽이 깨어지기 전에는 두 존재가 온전한 하나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저희 집 애가 가출을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친구 따라 재미로 나간 겁니까? 부모님과 의견 대립으로 나간 겁니까?" "사실 며칠 동안 많이 다투었습니다. 나야 저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해를 못해요." 그렇게 털어놓고 되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돌아올까요?" 그래서 대답을 했습니다. "한 쪽이 깨져야 오지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성숙해지든지 부모가 스스로를 낮추어서 자식의 입장이 되든지 뭔가 양쪽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 됨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참된 하나됨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모님의 말씀 다 옳습니다. 틀린 바 없습니다만 하나 되지 못하는 의로움이란 독선과 완고로 나타납니다. 일반적 강요가 되는 것입니다. 내용은 옳지만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을 독선이라 합니다. 반대로 의가 없는 하나 됨을 야합이라 합니다. 이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됨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를 깨뜨리는 겸손함이 없는 한 진정한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교훈 하되 바른 교훈으로 해야할 것입니다만 내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 생각을 강요하지 말고 자식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거기에, 기다리는 거기에 자기를 깨뜨리는 아픔이 있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되신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깨뜨리고 인간이 되시고 더러운 인간이 아닌 깨끗한 인간. 동정녀의 몸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엄청난 값을 희생으로 지불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십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배척받습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비극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외친 소리입니다. 사람의 인간적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깨달을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비밀, 그 복음의 소식이 목자들에게 들려 왔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이 들려 왔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요약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11절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선언!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 경제가 잘되고 건강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것도 복음은 복음입니다. 소위 우리가 원하는 복음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사회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복음입니다. 그러나 근본적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신다는 것, 너희 가운데 구주가 탄생하신다는 것, 너희의 힘으로가 아니라 나의 은혜로 너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 네 죄를 사해 주실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말씀. 이것이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은 우리와 어떠한 구체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가보면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표적이니라." 두 번째 복음의 내용입니다. 표적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메시지가 들어 있는 사건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강보에 쌓인 아기 속에 들어 있는 표적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표적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아기가 태어난다. 그것이 표적이니라." 그 아이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아이를 약속의 성취,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증거, 죄인에게 오시는 사랑의 증거로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증거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이를 표적으로 받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가?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가득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하늘을 보세요. 어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까? 어디 땅에 평화가 가득합니까? 사실은 가득하지 않습니다. 더욱 살벌하고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 땅에는 평화가 가득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영광입니다. 무엇이 영광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영광이 가득하다는데 그 영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광이란 다른 사람들을 내 앞에서 꼼짝 못하게 누르는 그래서 위엄 있게 군림하는 것을 가리켜 영광이라 말합니다. 대단히 세속적이고 때묻은 영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영광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광이란 높은 자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어머니의 영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름다운 얼굴, 좋은 몸매, 깨끗하게 차려 입은 옷, 잘 다듬은 손톱으로 여유를 부리며 아이가 밥 달라고 하면 "짜장면 시켜 먹어!"라고 말하는 어머니. 겉으로는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반대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눈물짓고 희생하고 어루만지고 자식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리고 자식한테 다 주고도 부족해서 미안해하는 어머니. 이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이기에 그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운 것 아니겠습니까? 장성한 자식도 그 어머니 앞에서 꼼짝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눈물과 희생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영광입니다.

 

 

주부들의 영광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내의 영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가사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이러한 고백을 남편에게 들으면 그것 영광된 아내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고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어떤 손이 되면 그것이 가능합니까? "젖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수고한 거칠어진 손마디, 뜨거운 정성으로 살아온 나날들…. 이 희생이 없는 한 진정한 영광은 없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만 여러분, 한 평생 편하게 지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너 뭐하다가 왔누?"라고 하실 때에 "저 편하게 살다가 왔습니다." 이것이 가장 부끄러운 고백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의 기준을 어디다 두고 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저 높은 곳에서 땅에 사는 인간들을 향하여 "고생들 많구나. 죄 많으니 벌받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에게 오셔서 낮아지고 초라해지는 하나님의 자기 비하, 자기의 깨뜨려짐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온 천지에 울리도록 외치는 말이 그것 아닙니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희생과 사랑으로 초라한 인간이 되어 탄생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오늘도 참고 기다리신다. 그 사랑과 희생 속에 무지무지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다"고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영광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 영광을 아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끝없이 샘솟게 됩니다. 이 영광을 아는 자에게 오늘 본문은 평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평화란 아무에게나 막 주는 싸구려 평화가 아닙니다. 본문은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으면서 아멘 하는 사람, 강보에 쌓여 누인 아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표적으로 받고 그 낮아지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것을 믿는 그들에게만 참 평화가 허락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란 군사적 의미의 평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란 철학적 의미의 평화, 정신적 평화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히브리적 개념의 평화, 샬롬입니다. 상황이나 형편과 상관없는 절대 평화, 충만하고 만족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이 평화를 얻었다고 해서 생활이 확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직업이 내일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황금과 물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눈에는 아기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아기는 단순한 한 아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받는 그에게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이길 수 있는 참된 의미의 평화가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고 많은 것이 사람입니다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는 자는 소수입니다. 지극히 제한된 사람만 듣고 있습니다. 반가운 소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늘도 온 세상이 들어야 할 큰 기쁨의 소식이 하늘에서 외쳐지고 있습니다만 목자들만 듣는 겁니다. 목자같이 깨어 있는 사람, 빛과 진리를 기다리는 사람, 하늘을 우러러 겸손한 사람, 그러한 사람만이 바르게 듣고 응답할 수 있는 겁니다.

 

 

크리스마스의 환경이란 징글벨이 울리는 명랑한 환경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어둡고 침울한 세대. 그 깜깜한 어둠을 뚫고 아주 가녀린 빛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아기! 탄생한 아기 하나뿐입니다. 이제 그 아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의지를 확인하는 그들에게 성탄은 진정한 성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목자들이 들었던 큰 기쁨의 소식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만 듣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것입니다. 이 소식 속에서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가 우리 가운데 싹 트기를 바랍니다. 목자들처럼 곤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구주께서 약속대로 탄생하셨다고 하는 그 말씀을 가슴속에 새길 때, 여러분은 이 시대의 또 하나의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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